메뉴 건너뛰기

2016.07.11 16:53

접시꽃 당신

조회 수 900 추천 수 184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접시꽃 당신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 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 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 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 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죽일 줄 모르고
약한 얼굴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먹장구름입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 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이 모두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합니다

남은 날들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이제 또 한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겠습니다.

---도종환 시집 접시꽃 당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