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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31 11:24

목 숨

조회 수 922 추천 수 15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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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숨...

임종을 얼마 남기지 않은 환자분들이 머물고 있는 요양병원에서 호스피스로 봉사를 하고 있는 어느 여성분이 계십니다. 어제 그 분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그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이 돌보는 환자 중에 20년 전에 하반신이 마비되고, 지금은 돌봐주는 가족도 없이 말기 암을 앓고 있는 오십대 남자 환자가 있었답니다. 그 호스피스 분은 보호자도 없는 그 환자를 만나 말동무도 해드리고 목욕도 시켜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 분의 머리를 감기고 목욕을 시켜드릴 때, 그 분이 자신의 체취를 맡으려고 노력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자신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라 번갈아서 그 분을 보살피던 동료 호스피스도 똑같이 느꼈다고 합니다.

그 환자분은 비록 하반신을 쓰지 못하고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여성의 체취가 그립고 여성의 품이 그리웠던 모양입니다. 그런 경우에 호스피스는 대개 그 환자에 대한 봉사를 중단하고 다른 환자로 바꾼다고 합니다.

그 호스피스 분도 그 환자를 놓고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 이미 동료 호스피스는 그 환자를 포기하고 다른 환자로 바꾸었고 자신도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을 해야 할 것 같았답니다.

고민고민하다가 그 환자를 계속해서 돌보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 환자가 생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겨우 버티고 있는 환자이고, 그동안 사람의 정이 얼마나 그리웠겠나 싶어서 이성이 아닌 어머니의 마음으로 돌봐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목욕봉사를 나가서 평소와 다름없이 그분의 말동무가 되어 드리고 머리도 감겨드리고, 목욕을 시킬 때는 오히려 가슴 가까이로 그분을 끌어당겨서 목욕을 시켜드렸다고 합니다. 사람의 체취가 그리우면 충분히 자신의 체취를 맡으라는 생각으로 가슴 가까이 당겨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환자는 너무나 편안한 얼굴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분을 목욕시켜드리고 사흘 후에 그 환자분은 세상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그 환자분이 어머니의 정이 그리웠는지, 아니면 이성의 정이 그리웠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그렇게 보듬어주고 보낸 것은 잘한 일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얼마 전에 호스피스 병동에서 찍은 ‘목숨’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 영화는 환자들이 병을 낫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오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말기 암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박수명이란 사람은 아내와 아들과 딸을 둔 40대 가장입니다. 그의 아내는 “당신이 식물인간이라도 좋으니 제발 곁에만 있어 달라”며 절규했습니다. 그러면서 끝까지 남편을 포기하지 않고 항암 치료를 계속했습니다.

두 아들의 엄마인 김정자씨는 고생고생해서 겨우 아파트 하나를 장만했는데 아파트에 입주하고 한 달 만에 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한평생 남편 뒷바라지와 아이들을 위해 살다가 이제 겨우 살만하니까 암에 걸린 주부였습니다.

그곳 호스피스 병동에는 신학교 3학년생인 스테파노 예비신부가 환자들을 돌보면서 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호스피스 병동에 오기 전에 세상 사람들의 죄악에 절망하여 자살을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예비신부가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을 앞둔 사람들과 함께 생활해보니 거기에는 모두가 착한 사람들뿐이었습니다. 나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남을 욕하는 사람도 없었고 남을 시기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병동을 떠나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갔습니다.

‘목숨’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드는 의문 하나는 ‘왜 사람들은 죽음에 임박해서야 착해지는 걸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평소에 착하게 살지 생을 마치고 죽음에 임박해서야 착해지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차이는 아마도 우리가 죽음에 임박해서야 그동안 우리가 집착했던 모든 것들이 헛되고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를 쓰고 얻으려 했던 많은 것들이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면서도 아무리 바빠도 가끔은 죽음을 의식하면서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 탐욕스럽지 않고, 남의 가슴에 못질도 덜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지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면서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세상을 사는 모습도 지금과는 많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오늘이 벌써 금요일입니다. 저는 내일 하화도에 갈 계획입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내가 살아보니까
.

장영희(張英姬)

.

출생, 사망 : (1952년 9월 14일~ 2009년 5월 9일) 서울특별시

국적 : 대한민국

학력 : 서강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 학위 취득

뉴욕주립대학교버펄로교대학원 영문학 박사

직업 : 서강대학교 교수, 수필가, 번역가

종교 : 천주교

부모 : 부친 장왕록박사 (전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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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희(張英姬 대학교수, 수필가, 번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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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남의 삶에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다.

그래서 남을 쳐다볼 때는 부러워서든 불쌍해서든

그저 호기심이나 구경 차원을 넘지 않는다.

.

내가 살아보니까,

정말이지 명품 핸드백을 들고 다니든,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든 중요한 것은

그 내용물이란 것이다.

.

내가 살아보니까,

남들의 가치 기준에 따라

내 목표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나를 남과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시간 낭비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 가치를 깎아 내리는

바보 같은 짓인 줄 알겠다는 것이다.

.

내가 살아보니까

결국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니고 알맹이이다.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이다

예쁘고 잘 생긴 사람은 TV에서 보거나

거리에서 구경하면 되고

내 실속 차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재미있게 공부해서 실력 쌓고, 진지하게 놀아서 경험 쌓고,

진정으로 남을 대해 덕을 쌓는 것이 결국 내 실속이다.

.

내가 살아보니까,

내가 주는 친절과 사랑은 밑지는 적이 없다.

내가 남의 말만 듣고 월급 모아

주식이나 부동산에 투자한 것은 몽땅 다 망했지만,

무심히 또는 의도적으로 한 작은 선행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에 고마움으로 남게된다.

.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1분이 걸리고,

그리고 그와 사귀는 것은 한 시간이 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루가 걸리지만

그를 잊어버리는 것은 일생이 걸린다는 말이 있다.

남의 마음 속에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것만큼 보장된 투자는 없다.

.

- 장영희교수"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중에서 -




I Love You Because / Jim Ree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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