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뽑기 장사 청초 이용분
어떤 신부님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어머니가 돈 천원을 주면서 가게에 가서 두부와 콩나물을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키셨다. 콩나물 가게에 가는 동네 길 어귀에 '또 뽑기' 장사가 보였다.
그는 엄마가 두부 콩나물을 사오라던 이야기는 애저녁에 깜박 잊은 채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또 뽑기' 삼매에 빠져 버렸다. 해가 저물자 동네 아이들은 다들 제 집으로 돌아갔다.
손안에 쥐었던 돈은 이미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고 갑자기 어머니의 엄한 얼굴이 떠올랐다.
바로 집 울타리 근처에 숨어서 어찌할까 망서리다 보니 어느 새 날이 어두워졌다.
심부름을 보냈던 어머니는 집에서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면서
‘이 녀석 돌아오기만 해 봐라’벼루다가 날이 저무니 이제는 걱정이 앞서는 게 아닌가.
콩나물 두부 생각은 까맣게 잊고 오직 아이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셨다.
신부님도 보통 우리네와 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나 보다.
누구나 이런 추억이 있을 것이다. 내 아이가 어렸을 때 조붓한 골목 끝 조금 넓은 공터에
‘또 뽑기’ 장사가 매일 진을 치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동네 어린아이들이 봄날 얕은
물웅덩이 속에 올챙이 모이듯이 오골 오골 머리를 맞대고 모여 있다.
근데 어느 날 보니 그 속에 우리아이가 턱을 괴고 끼어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며칠 전엔가 도 '또 뽑기'를 하여서 주의를 시켰건만 또 다시 간 것이다. 우리 아이가 초등
학교 들어가기 전 6~7세 때인가... 아이 말에 의하면 그날따라 엄마지갑에서 몰래
오백 원짜리 큰돈을 꺼내 가지고 갔단다. 엄마가 옷깃 뒤쪽을 잡아내어 끌려 왔었다며 웃는다.
또 뽑기가 10원을 하던 시절이니 아이에게는 큰돈이다. 한참 세월이 흐른 뒤 살았던 그곳이
그리워 찾아갔더니 똑같은 장소에 여전히 아이들이 또 뽑기 장사 앞에 모여 있었다.
또 뽑기라는 게 흑설탕에 가성소다를 부어 뜨거운 불에 올려놓으면 설탕이 누런색갈로
변하면서 '부글부글' 끓어올라 그야말로 불량식품의 전형인 것처럼 보인다.
이제는 골목길에 엿 장사 가위 소리가 사라진지 오래다. 사이다 빈 병이나 헌 양은 냄비,
헤어진 고무신을 가지고 가면 입맛대로 호박엿도 주고 옥수수 뻥튀기도 주었다.
어떤 친구 아들이 하루는 엿이 먹고 싶어 엄마가 사준 새 고무신을 들고 갔더니 이런 새
고무신은 받지 않는다고 하더란다. 그 당시 엿 장사는 마음이 곧았나 보다. 집에 돌아 와서
그 새 고무신을 가위로 삭둑 잘라 가지고 가서 엿으로 바꿔 먹다가 엄마한테 들켰다.
"엄마가 새로 사준 고무신으로 이렇게 사먹으면 되겠니" 혼을 내었다.
“군것 질 거리가 없어서 그랬다" 하여 혼내기를 그치고 엄마도 함께 그 엿을 먹었다 한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일제 강점기에 2차 대전과 6.25동란을 겪는 동안 살기가 참 힘들었다.
쌀이 없어 끼니를 굶는 집이 허다했다. 다른 집에 쌀을 꾸러가는 일은 예사롭던 시절이 있었다.
손님이 오면 집에서 키우는 닭을 한 마리 잡아서 커다란 솥에 물을 하나 가득 붓고 푹 삶아서
국물에 닭살코기 몇 점을 넣어 국한그릇을 먹는 맛이란 그날이 모두의 생일날이었다.
그후 처음 치킨튀김을 먹게 되었을 때 이걸 물에 푹 삶아 먹으면 온 식구가 먹을 텐데...
생각하며 미안스러웠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 궁핍한 시절을 옛일로 잊혀지고 과잉
영양식으로 아이들은 비만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에는 먹으려고 들면 초코렛에 쿠키에 피자 등 얼마나 먹을 게 흔한 세상인가...
이런 풍요로운 세상에도 무엇이 그렇게 매력이 있는지 명동에 가도 그 장사가 있다고 한다.
그도 어린 날의 향수인지 어른이 된 우리아이도 이따금씩 ‘또 뽑기’를 사먹는단다.
봄이 되니 요즘도 학교 교문 앞에 가보면 여전히 또 뽑기 장사 앞에는 아이들이 오골오골 머리를 맞대고 있다.